글. 서민재 아침부터 냉장고를 뒤져 냉동 새우를 찾았다. 꽁꽁 언 분홍빛 몸체들이 얼음 뭉치와 함께 뒤엉켜있었다. 혼자 먹는 점심은 대충 때우기 마련이어서, 오늘만큼은 조금 특별한 것을 먹기로 한 것이다. 오늘이 특별한 날이어서는 아니다. 그냥, 말 그대로 그냥.오전 업무를 마치고 방에서 나와 부엌에 섰다. 실은 오전 업무를 채 마무리 짓지 못했지만 시간은 오후를 향하고 있었으므로.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아침에 꺼내놓은 새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나는 뻗었던 손을 다시 거두었다. 전에 보지 못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글. 서민재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명품은 못 사고 딸기는 먹습니다’라는 표현을 보았다. 익명의 글쓴이가 자신의 소득 수준을 누구나 이해하기 쉽도록 표현한 문장이었다. 4인 가족이라고 말한 글쓴이는 자신과 자기 가족이 처한 경제적 상황을, 어떠한 숫자도 쓰지 않고 설명하는 데 성공했다.한 문장이었지만, 그저 그런 한 문장이 아니었다. 그 뒤에 숨겨져 있을 수많은 이야기와 삶의 서사를 힐끗 드러내는 경제적 은유였다. 나는 그 표현의 참신성에 놀라면서도 두 가지 장면을 떠올렸다. 아이가 딸기를 너무 좋아한다며 쓴웃음 짓는 한 부모의
글. 서민재 콩!콩!콩!콩! 바닥이 울린다. 콩!콩!콩!콩! 누군가 콘크리트 계단을 빠르게 두드린다.콩!콩!콩!콩! 소리는 점점 가까워진다.순식간에 젊은 여성 한 분이 내 옆을 지나갔다. 겨울바람만큼 빠르고 차갑게. 콘크리트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는 그녀의 플랫 슈즈가 기차역 계단을 빠르게 딛는 소리였다. 넘어지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는 서둘러 KTX 타는 곳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갔다.다급함에 비해 발걸음이 빠르지 못해 안타까운 건 나도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과연 기차를 잡을 수 있을까? 아래쪽으로 보이는 기차는
글. 서민재 “우리도 탕후루 한번 먹어볼까?”어느 날 저녁, 아내가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중국식 과자인 탕후루를 먹자고 한 것이다. 색색의 과일에 투명한 설탕 시럽을 입혀 나무 막대에 꽂은 음식. 반짝 빛나는 모습에 눈이 즐거운 과일꼬치. 탕후루는 요즘 아이들의 흔한 길거리 간식이다.나는 아내의 얼굴을 마주하고 ‘갑자기 웬 탕후루?’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내가 입을 열었다. 주말 아르바이트를 하는 매장 쓰레기통에 탕후루 막대가 엄청 많단다. 그러니까 그 맛과 색이 궁금해서 같이 먹어보자는 거였다. 그 아이 같은 발상과 제안에 나는
글. 임길순 보이지 않았던 나의 속내가 훤하게 보인다. 섣달의 나뭇가지에 매달린 마지막 잎새라도 따서 가리고 싶은 후회로 부끄러운 마지막 달이다.중국의 서예가 왕희지(AD303~361)의 아득한 후손 왕양명(1472~1529)의 심즉리(心卽理)가 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존재나 현상은 오로지 인간 각자의 마음에 따라 정해진다고 했다. 왕양명이 남진을 유람 중이었다. 그때 한 벗이 바위들 속의 꽃나무를 가리키며 물었다. “천하에 마음 밖의 사물은 없다고 하지만, 이 꽃나무와 같이 깊은 산속에 스스로 피었다가 지는 것인바, 그 또한 내
글. 임길순 의림지 둘레길의 꽃들과 사부작대며 해찰하다가 친구들을 놓쳤다. 잰걸음으로 공원의 야외무대에서 들리는 음악 소리도 지나쳤다. 그런데 무대 주변에서 음악을 듣는 인파 중에 하얀 티셔츠 입은 부부가 인연이 있던 이들 같다. 남편 되는 사람도 허둥대며 바쁜 걸음으로 지나치는 나를 알아본 듯 고개를 갸우뚱한다. 앞으로 내지르던 급한 걸음을 뒷걸음질 쳐서 그들에게 다가갔다. “세상에… 많이 보고 싶었어요.” 나는 조금 전 과꽃 위에 앉았던 이슬처럼 맑고 청명한 그녀를 꼭 안았다. 그녀도 나를 꼭 껴안았다. 그녀에게서 조금 전 둘레
글. 임길순 3000배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기심이 없어지고 순해진다. 오래전 40년 가까이 된 일이다. 가끔 그때 만났던 그 아이들을 위해서 깊고 깊은 속마음으로 절을 할 때가 있다. 그 아기 부처들은 어찌 되었을지 몹시 궁금해서 간절하게 합장하기도 한다. 지금은 모두 폐광산이 된 강원도 고한, 태백, 문경. 이 지역이 석탄 광산으로 산업의 원동력이 되던 때가 있었다. 고한에서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아이들과 3000배를 한 적이 있다. 작은 수련회에서 그 아이들과 만났다. 내가 죽비를 치면 소리에 맞춰 함께 절을 했다. 절을 시
글. 임길순 고운 할머니가 휠체어에 앉아 우리 쪽으로 오는 모습이 보인다. 발딱 일어나 유리문을 열어 그녀를 맞았다. 금방이라도 사그라질 것 같은 봉숭아 꽃씨 닮은 노인이 ‘우리를 알아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먼저 말을 하지 못했다.“어떻게 왔어.”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오히려 우리를 맞이한다.“엄마가 보고 싶어서 왔지.” 다시 미소를 짓는다.“어떻게 셋이 만나서 왔니.” 이렇게 짧은 몇 마디의 말이 감사해서 눈물이 핑 돌았다. 다행이었다. 엄마를 만나러 갈 때마다 우리를 알아보지 못할까 봐 무섭다. 이번에도 우리를 슬프게
출산통보제 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고 한다. 출산통보제는 부모가 고의로 출생신고를 빠뜨려 유령아동이 생기지 않도록 의료기관이 출생정보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을 통해 지방자치단체에 통보하고 지자체가 출생신고를 하도록 하는 제도다.이 법안을 두고 많은 갑론을박이 있다. 아무리 촘촘하고 세밀한 법률이 만들어진다 해도 사회의 인식이 변하지 않으면 법은 법으로 존재할 뿐이다. 불교 경전 중의 하나인 에 ‘중생이 아프면 나도 또한 아프다’는 글귀가 있다. 모든 생명의 존재는 법 이전에 진리의 측면에서 절대 평등이다. 세상에서 가장
글. 임길순 산이 꽉 차 있다. 사람으로 치면 어느 나이쯤 될까. 어린 시절 아버지가 무심하게 툭 내뱉던 산이 꽉 찼다는 말이 참 좋았다. 그 말을 혼잣말로 허공에 던질 때 파란 하늘과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내가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던 나이를 훌쩍 넘어섰지만, 집 앞에 힘차게 솟은 산을 보면서 푸르다, 녹음이 짙다는 생각은 했어도 산이 꽉 찼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연암 박지원의 산문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에서 “거문고가 웅장하게 들리는 듯한 소리는 슬픈 마음으로 들은 것이고, 바람에 문풍지가 떠는 듯한 소리는 의심스
할아버지 진짓상에는 정종과 조기가 웬만하면 있었다. 따듯하게 데운 정종이 올려져 있었던 건 대체로 점심때였다. 반주로 딱 한 잔만 잡수셨던 정종은 내 관심 밖이라 눈에 띄지 않았고 우리 자매들 밥상에 없던 조기만 보였다. 할아버지 상을 따로 방에 들이고 난 뒤에 안방에서 아버지와 오빠, 남자들이 상을 받았다. 그제야 할머니와 우리 여자들은 밥상머리에 앉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우리 상은 방 윗목으로 밀려나 비릿한 콩나물시루가 면포를 쓰고 쑥쑥 자라는 걸 보면서 밥을 먹었다. 밥상에 빠지지 않던 콩나물 반찬이 싫지 않았던지 콩나물시루
글. 임길순 “엄마, 엄마가 학교 선생님에게 상담하지 않은 것 천만다행이야.” 중학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련회를 마치고 돌아온 아이가 현관문을 들어서면서 하는 말이다. 아이와 밑도 끝도 없이 나눈 대화지만 학교 친구와의 갈등과 모자간의 약속이 종결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중학교 새내기로 입학 후 며칠 지나지 않아 사춘기가 양 볼에 꽉 찬 아이는 교실 자리배정에 불평을 시작했다. 바로 뒷자리에 앉은 친구가 수업 시간에 볼펜으로 옆구리를 콕콕 찔러서 짜증과 화가 나는 걸 참느라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입학식 날도 불안
글. 임길순 “이모, 궁금한 게 있는데?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태어나는 아기들이 많잖아, 그런데 왜 살아가는 것이 모두 다르지?” 초등학교 시절부터 고3까지 우리 집으로 놀러 와 외사촌 동생들에게 형 노릇을 톡톡히 해주던 녀석이었다. 그들은 맞벌이 부부다. 결혼하고 꽤 여러 해가 지나도록 조카며느리가 아기 소식이 없었다. 걱정이 많던 조카가 임신 소식을 알리는 전화였다. “이모, 어렵게 온 우리 아기 소중하게 잘 키울 거야”라는 말끝에 이런 엉뚱한 걸 물었다. 오행에 관심이 많은 나는 소중한 생명을 건강하게 잘 키우기를 바라며 신
초록들이 고운 꿈을 꾸는 초하(初夏)의 계절입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계절을 맞아 사랑하는 임들에게 여쭈어봅니다. "초록편지를 받으셨나요?’ 초록둥이들이 예쁘게 접어 보낸 초록편지가 우리들의 창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답니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초록 편지! 삶이 조금 힘겹다고 느껴질 때 초록편지를 보시면 위로가 되실 거예요.초록편지 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어요. ‘아침마다 장엄하게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 보셨나요? 풀잎에 맺힌 영롱한 이슬 방울도 보이시나요? 나뭇가지에 앉아 제 이름을 부르며 지저귀는 새들의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들리시나
글. 임길순 수필집 출간 준비를 하면서 아들에게 교정을 부탁했다. 이런저런 핑계로 거절하는 녀석에게 아르바이트 비용을 주겠다는 달콤한 유혹을 했다. 지가 고효용노동자라고 높은 비용을 요구했다. 돈이 아깝긴 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녀석들이 언제 엄마 글을 읽어줄까 싶어 치사함을 꾹 참았다.비용은 선지불 원칙이라기에 거래가 끝났는데, 시험 기간이라며 차일피일 미뤄서 이번에는 아르바이트 의뢰인이 아닌 엄마의 강압을 썼다. “알았어, 알았어, 내일은 꼭 해줄게” 하더니 다음날 컴퓨터를 들고 집 앞 카페로 나갔다. 저녁이 한참 지난
글. 임길순12월 마지막 주에 하는 용맹정진이 시작되었다. 일주일의 짧은 기간에 하루 18시간을 온전히 화두에 몰입하기 위해서 몸부림친다. 첫날은 편안함에 익숙해졌던 몸을 조복시키느라 화두 챙기기가 어렵다. 다리가 심하게 저릴 때는 화두와 치열하게 싸우고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시계 초침과의 사투가 시작된다. 1분을, 60초를 1초, 2초, 3초, …. 마치 화두에 몰입하듯 센다. 긴 1분이다. 60초가 온몸의 고통이 되는 것을 경험하면서 하루가 지나면 그래도 오랫동안 꾸준히 앉아보려고 했던 그간의 노력을 고맙게도 몸이 기억해 준다
글. 임길순 ‘어머님 아침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하지’ 하고 봉당에서 마당으로 내려서려는데 마을 전봇대에 달아놓은 스피커에서 경쾌한 음악 소리가 나더니 곧이어 이장님의 안내 방송이 있다. “어! 어! 어르신들 안녕히 주무셨어요. 이장입니다. 오늘은 일전에 안내해 드린 대로 김봉래 어르신의 생일입니다. 적누리 어르신들은 김봉래 어르신의 자녀분들이 마을회관에서 아침 식사를 차린다고 하니 식사를 하지 마시고 회관으로 오시기 바랍니다. 흠! 흠! 이상, 이장이었습니다.”할머니 집에서 잠을 자던 아이들이 부스스한 얼굴로 잠결에 무슨 일인가 싶
아연광산의 두 영웅과 원기 108년 토끼해글. 장재훈 그대여, 아십니까?원기 107년(2022) 10월 26일,경북 봉화 아연광산지하 190m 갱도에 갇힌 어둠 속에서도희망을 잃지 않은 분들을 아십니까? 작은 불빛과 커피믹스와 소량의 물로 버티다가221시간 만에 극적으로 생환한 두 영웅을 아십니까?24시간 내내 조금도 쉬지 않고구조에 힘을 쏟은 동료 광부들과 구조 당국,응원하며 여러 방면에서 힘을 보내고 기도한 대한민국 국민들을 아십니까?마침내 11월 4일, 9일 만에작업조장 박정하 씨와 보조작업자 A 씨를 구조시킨기적의 나라, 의
2022, 겨울에 펼쳐질 월드컵글. 장재훈 2001년 필자가 당시 썼던 장편동화 의 몇 장면을 발췌해 보려합니다.…브라질의 격렬한 태클에 한국 팀 선수가 두 명이나 들것에 실려 나가고 후보 선수가 뛰었지만, 새로 투입 된 선수들도 금세 부상을 입고 절뚝거리며 뛰어다녔습니다. 그 틈을 이용하여 브라질에서는 한국 골문에 두 골이나 넣고 말았습니다.처음에는 맥없이 슬슬 져주는 척하다가 집중적으로 고사포 같은 역습 공격을 펼치라는 한국 팀의 작전이었지만, 월드컵 결승전에서의 두 골이란 큰 것이었습니다. 어이없
서로 다른 형형한 눈빛글. 장재훈 정말 그럴 때가 있을 겁니다.어디 가나 벽이고 무인도이고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누가 “괜찮니”라고 말을 걸어도금세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중략)그런 때에는 연필 한 자루 잘 깎아글을 씁니다.사소한 것들에 대하여어제보다 조금 더 자란 손톱에 대하여문득 발견한 묵은 흉터에 대하여떨어진 단추에 대하여빗방울에 대하여정말 그럴 때가 있을 겁니다.어디 가나 벽이고 무인도이고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이어령의 시 ‘정말 그럴 때가’ 일부이어령 씨를 생전에 몇 번 뵌 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