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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값 해라정리. 조예현 기자“성경(聖經)이라 해라, 앞으로 할 일이 있다. 이름값 해라. 신심과 공심으로 잘 살아라.”명타원 민성경 종사는 총부에서 소태산 대종사님을 배알하고 그 자리에서 친필로 법명을 받았다. 이후 흐트러짐 없이 대종사의 가르침대로 살아온 무명성자이다.명타원은 대종사께 직접 들은 말을 기억한다. 대종사께서 대각 후 상황에 대해 “내가 그 때 너무 기뻐서 버선발로 다닐 때 발이 땅에 닿는지 몰랐다”하는 말씀을 여러 차례 하셨다고. 지금 원광대학 자리가 그때는 높은 황토밭이었는데 저녁에 산책을 가셔서 “여기가 크게
책 속의 소태산
조예현
2022.04.27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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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해 어서 해” 스승의 기운정리. 조예현 기자“심심장지(深深藏之)하였던 귀한 재산을 별안간 전부 희사함은 불가하니 차차 지내면서 하도록 하라.”대종사는 청춘이 애써 모은 재산을 단번에 내놓겠다는 말을 듣고 시간을 두고 잘 생각해 보라고 재차 다짐을 두었다.언제나 명랑 쾌활하고 다정한 용모와 음성의 주인공 오타원 이청춘. 그는 대의에 밝고 일을 당해서는 결단력이 뛰어난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초창 교단 개척에 있어 오타원 이청춘은 교단 1대 1회내 창립 특등 유공인이다. 본교 사업이 겨우겨우 간고한 첫 걸음을 내딛을 때 오타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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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원광
2022.04.26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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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 창업에 참여하라”정리. 조예현 기자십타원 양하운 대사모님은 소태산 대종사 대각 이전에 대종사님과 결혼하신 후 대종사님 구도과정에서 내조와 보필의 역할을 지성으로 하셨다. 대종사님 대각 후에는 초기 교단의 창업과 기반을 다지며 대종사님께서 사가에 대한 심려를 덜 하시도록 자녀양육과 사가 살림을 정성으로 꾸리셨다. 뿐만 아니라 교단 창업의 간고한 현장에나 초기제자들의 교화과정에서 정토회원으로서 도움이 필요할 때에는 언제나 십타원 대사모님이 계셨다. 십타원 대사모님은 원불교 정토회원 제1호요, 정토회의 원근으로서의 생애를 살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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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원광
2022.03.03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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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그 정성을 계속하면큰 공부하겠다”정리. 장지해 교무이미 라선 언니가 출가하여 총부에 계셨다. 나는 그때까지 전무출신이 무엇인지 몰랐고 다만 언니가 이곳에서 무슨 공부를 하는가 궁금해서 달려왔던 것이다. 내가 중앙총부에 온다고 했을 때 내 숙부님께서는 극구 반대하셨다. 전무출신에 대한 이해가 없었기 때문에 언니가 나간 것만으로도 안타까웠는데 나까지 간다고 하니 말리셨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처사셨는지 모른다.그러나 이런 반대에도 기어이 가겠다는 나를 붙잡지는 못하셨고, 초행인 내가 염려되셨음인지 총부 언니에게 전보를 치셨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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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원광
2022.01.28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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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옳게 잡았다”정리. 장지해 편집장내가 3~4살쯤 되었을 때인 것 같다. 어머님 무릎에 앉아 있었는데, 그때 아버님(소태산 대종사)께서 나에게 “네 마음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셨다. 방안에는 갓 결혼한 신부가 옆에 와 있었다. 나는 얼른 “신부 코 끝에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아버님께서는 아무 말씀은 없으셨지만 신통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그때 코끝이 빨갛던 신부를 유심히 보고 있었기 때문에 내 마음이 바로 그 신부의 코에 가 있었다고 대답했었다고 생각된다.나는 어려서부터 아버님으로부터 알게 모르게 정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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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원광
2022.01.28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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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난한다면 대완은 무엇으로써대답하겠느뇨?”정리. 장지해 편집장영산 박대완은 구한말과 일제치하 시대의 풍운아로서 국내외를 돌아다니 다가 소태산 대종사의 제자가 되었다. 원불교에 입문한 영산 박대완은 원기 13년 44세부터는 농공부원으로 1년간 근무하였다. 똥지게를 지고 다니면서 신명나게 염불을 하고 ‘알봉’에 박을 심어 박장사를 하며 누에치기도 하였다. 영산은 당시 농공부원으로 일하는 동안에 소태산 대종사님(이하 대종사님)의 자비원력과 훈증 아래 영육쌍전의 수련을 한시도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중략)영산 박대완 대봉도가 등장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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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원광
2021.12.02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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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생활에서 금강경을 발견하라”정리. 장지해 편집장고산 이운권 종사는 19세 때인 원기 17년 12월, 영산성지에 다녀오고자 떠나신 지 수일이 경과하였으나 돌아오지 않은 부친을 모시러 영산에 간 것이 소태산 대종사(이하 대종사)를 친견하고 교단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때 대종사께 인사를 드리자 대종사는 기다리신 듯이 “네가 올 줄 알았다”며 즉석에서 운권(雲捲)이란 법명을 주시면서 “아버지 출가는 못하게 하였으니 대신 네가 나와야 할 것 아니냐?”라고 하셨다.(대종사께서 부친의 출가를 허락하지 않은 것은 이미 두 분의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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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원광
2021.10.29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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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부처되는 법을 가르쳐주지”정리. 김지윤 기자다음은 황온순의 회고담이다.1936년, 나는 서울에 처음으로 교당이 설립된 돈암동에서 상경하신 소태산 대종사님(이하 대종사님)을 처음 만났다. 나는 인사할 줄도 모르고 그냥 있었다. 소태산 대종사님은 무명 바지 저고리를 입으셨다. 처음 뵙는 소태산 대종사님은 안광(眼光)이 부셨다. 겁없이 들어선 나는 대종사님의 풍채와 기에 눌려 무릎을 꿇고 앉게 되었다. 완전히 압도되었다.“어떻게 오셨습니까?” 대종사님의 첫 말씀이셨다. 나는 천륜씨의 소개로 왔다고 대답하고는 물었다. “여기는 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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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원광
2021.08.12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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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이 공부만 잘하면천하에 없는 복을 받을 것이다”정리. 김지윤 기자원기 25년 음력 11월 4일 밤, 균타원은 그 날로 모든 준비를 끝내고 집 대문을 나서기로 했다. 아무도 없는 한밤중 그래도 균타원은 두려움이나 무서움을 느끼지 않았다. 얼마나 꿋꿋하게 결심했는지 그 캄캄한 밤이 어둡지가 않고 길이 환하게 보였다. 마침내 균타원은 그 뜻을 이루었다. 두터운 장벽을 넘어 출가의 길을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1년 동안 영산에서 공양원 생활을 하였다. 주로 식당에서 국 끓이는 일과 물 긷는 일을 맡아 했다. 행여 쫓겨나기라도 할까봐
책 속의 소태산
김지윤
2021.08.06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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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이 회상에 왔으니공부 잘해야지?”정리. 김지윤 기자원기 24년(1939) 법산의 나이 13세 때였다. 첫발을 내딛게 된 총부 도량은 그야말로 선경이었다. 그로부터 법산에게 주어진 임무는 소태산 대종사 사가에서 밥하는 일이었다. 그 때 양하운 대사모와 소태산 대종사의 둘째 아들인 광령이 몹시 앓고 있었다. 그 일손을 돕기 위해 법산은 서툰 솜씨로 밥을 짓게 되었지만, 마음속으로는 남자가 밥을 한다는 것이 못내 불편했다. 그러던 어느 날 판자울타리에 뚫린 구멍으로 처음 소태산 대종사를 뵈올 수 있었다. 화창한 날씨였는데 검은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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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윤
2021.08.06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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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마음 가운데 사표로 모시는스승이 누구냐?”정리. 김지윤 기자향산은 20세 때 백양사를 찾았다. 낯선 사람들과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게 된 설레임 속에 첫날밤을 맞이한 깊은 밤, 향산은 꿈을 꾸었다. 검은 도포를 입은 분이 나타나더니 대뜸 크게 호령을 했다. “네 이놈, 왜 여기 왔느냐? 당장 이곳을 떠나거라. 이곳은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그러나 향산은 이왕에 온 길이니 있어 보아야겠다고 마음먹고 약 두 달 동안 그대로 머물렀다. 2개월을 지낸 후 식비도 마련해야했고 계절이 바뀌어 옷도 가져와야겠기에 집에 다녀오리라 생각했다
책 속의 소태산
김지윤
2021.07.06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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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바위 밑에는 무얼 숨겼지?”정리. 김지윤 기자팔산 종사는 소태산 대종사보다 12살이나 연상이지만, 사제지의를 정한 후로는 모든 예의에 조금도 서투른 점이 없었다. 소태산 대종사를 모심에 언어동작이 극히 공손하여 마치 효자가 엄부를 대하는 태도였으니, 아무리 바쁜 일을 하다가도 소태산 대종사가 부르면 일분 일각도 지체하는 일이 없었다. 소태산 대종사와 자리를 같이하여 나란히 앉은 일도 없었고 사용하는 도구까지도 존중히 하지 않음이 없었다.특히 신장이 크고 건강한 몸으로 9인 단원 중 으뜸가는 기력을 가졌던 팔산은 가정 형편도
책 속의 소태산
김지윤
2021.05.04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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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정신 차려 올라 오시오”정리. 김지윤 기자그녀가 불법연구회 기성 조합장 소태산을 만난 것은 정식으로 불법연구회가 창립되기 두 달 전인 원기 9년(1924) 4월이었다. 이경수(육타원 이동진화 종사)는 서른 한 살 되던 해 봄, 박사시화의 안내로 소태산을 친견하였다. 왕조의 시대는 사라졌으나 이궁가(李宮家)에서 물질적으로 퍽 영화롭게 지내던 그녀는 이 무렵 극도의 신경쇠약에 걸려 있었다.성질이 불같아 의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던지기 일쑤였고 늘 건강이 좋지 않아 뱃속이 쓰라렸는가 하면 또 두통을 앓는 괴로움이 있었다. 소태
책 속의 소태산
김지윤
2021.04.30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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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산의 성리 설하는 것을 들으니정신이 상쾌하다.”정리. 장지해 편집장원기 13년(1928)은 삼산 생애에 있어서 가장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해였다. 5월 5일 제6회 평의원 회의에서 삼산은 총재 선생주(소태산 대종사)의 지명으로 서무부장직을 맡게 되었다. 서무부 일이란 회중의 재정 및 사업 관계 일을 보는 사람이었다. 말이 부장이지 매일 일꾼을 감독하는 일이 많으므로 삼산을 두고 일명 십장 법사(十長法師)라 일컬을 정도였다.하루는 삼산이 마을 인부를 얻어 강당 앞에서 생강밭(현 공회당과 구학림사 사이)을 매고 있었다. 생강밭을 매다
책 속의 소태산
장지해
2021.03.02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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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도의성품을 아는구나.”도열(송도성의 호적명)이 소태산을 처음 뵙기는 열세 살 때였다. 한 번 뵙고 법문을 듣자 열이는 즉석에서 제자 되기를 청하였다. 소태산은 연소한 아이의 마음을 기특히 여기어 물었다. “너가 어떻게 그런 마음이 났느냐?” 도열은 “부심자(夫心者)는 지광지대물(至廣至大物)이니 수련정신(修練精神)하여 적충기지대지심이이(摘充其至大之心而耳)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너가 도의 성품을 아는구나. 앞으로 도성(道性)이라 이름하거라.” 이리하여 도열은 법명을 도성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때 집안 식구가 모두 소태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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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원광
2021.01.27 1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