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이성심 편집인 서울 안국역 사거리 동쪽은 창덕궁, 남쪽은 낙원상가, 서쪽은 인사동과 삼청동 입구, 송현광장, 북쪽의 북촌은 2번 출구로 나와 헌법재판소를 지나 가회동 방면으로 가면 만날 수 있다. 소태산 대종사가 1924년 음력 2월 경성(서울)역 도착 후, 태평여관에서 유숙. 다음날 박사시화의 안내로 쌍둥이 동생 박공명선이 살고 있는 계동집에 도착했다. 계동, 북촌, 가회동(북촌길 순례 코스)은 안국역을 중심으로 모두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거리이다. 계동 성성원의 집당시 박공명선 교도는 남편과 일찍 사별하고 외동딸인 성성원
답사. 이성심 편집인 세계인들이 한국 원불교 성지 순례를 하겠다고 줄 서는 날이 언제일까. 서울권, 전남·북권, 경상권, 금강산권, 기차역 등은 소태산 대종사의 행적이 타임캡슐에 그대로 담겨 있는 듯하다. 언젠가 그 캡슐이 일시에 열릴 날을 희망하며 2월 1일 월초기도를 마친 후 소태산 발자취 서울 시내 답사 일정을 시작했다. 안내는 서울 원문화해설단 이태언 교도가 동행했다. 본사 사무실이 소재한 여의도교당 인근 진주아파트 버스정류장에서 162번 버스에 승차, 30여 분 후 서울역버스환승센터에서 하차했다. 횡단보도를 건너 도보로 연
답사. 이성심 편집인 작고 작은 빨간 단풍이 아기 손을 닮아서 붙여진 이름 아기 손 단풍. 정읍 내장사 일대는 아기 손 단풍으로 유명하다. 가을이면 전국에서 이 단풍을 보러 사람들이 방문한다. 지난해 11월 둘째주 토요일. 그날도 그랬다. 내장 교차로에서부터 내장사까지 약 8.8Km. 2시간 넘게 서행 운전으로 도착했다. 이제 한겨울, 눈 내린 내장사는 눈꽃 세상으로 변했겠다. 아직 떨구지 못한 아기 손 단풍 위에도 눈이 내려 눈꽃단풍이 펼쳐졌겠지. 다시 가고 싶은 곳이다. 야단법석 난장을 지나야단(惹端)법석이 이런 것일까? 내장사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인기 있는 장소를 핫플레이스(hot place, 핫플)라 한다. 과거엔 입소문으로 그 핫플이 정해졌다. 지금은 1인 미디어 시대인지라 SNS를 통해 정해지기도 한다. 대중매체도 SNS를 검색, 답사 후 보도를 결정하는 경향이 있다고나 할까. 물론 개인에 따라 그 핫플은 핫 할 수도 있지만 실망을 줄 수도 있다. 취향 때문이지만 소수이다. 100년 전을 상상해 본다. 문자시대, 도(道)를 찾아다니던 사람들(도꾼)에게도 부안 변산 실상사 옆 석두암터는 핫플이었다. 생불(生佛)이 계신다는 입소문 때문. 특히 방물장수
답사. 이성심 편집인 가을 단풍을 보려는 여행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 김제 금산사. 금산사는 미륵전이 존재해 더 유명한 것 같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도 기미년(1919) 이후 인심이 극히 날카롭고, 관헌의 지목이 집중됨에 따라 김제 금산사에서 휴양을 하셨다. 21. 교단수난장 3절과 4절에서 금산사 관련 일화를 알 수 있다. 수류금산(水流金山)원기 4년 소태산 대종사는 법인성사를 마치고 김제 금산사로 향했다. 당시 금산면 모악산 아래 금산사 인근은 각 종교의 집합체였다. 지금도 ‘수류금산’ 치유순례길이 운영되고 있
출가 이후, 교화 현장이나 기관 등에 근무하다 보면 영산 성지순례는 큰마음을 먹어야 한다. 이리 저리 일정 조절을 해야 그나마 연 1회 갈까 말까 하게 된다. 그런 영산성지를 10월 추석 연휴에 방문했다. 몇 년 만에 방문한 삼밭재인지. 삼밭재 오를 마음에 추석 연휴는 언제부터 설렜다. 의 명대사처럼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질 거야.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만큼 나는 더 행복해질 거야.”그랬다. 서울에서 영광까지 버스로 6시간. 밀렸지만 긴 시간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소태산 대종사의 구도정신을 체 받
소태산 대종사의 발자취가 어려 있는 장소를 방문하면 흥망성쇠에 따른 그 어떤 분위기, 기운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후진들의 흥망성쇠와 연결이 되고 장엄의 정도도 생각하게 한다. “대종사께서 이 회상 여실 준비로 이 땅에 여러 번 나오셨나니, 나옹, 진묵, 영운조사는 물론, 드러나지 않게도 여러 번 나시어, 미리 인연을 이 땅에 심으셨나니라.” 정산 종사의 이 말씀은 소태산 대종사를 여러 성인과 겹쳐보이게 하는 스펙트럼 효과를 갖게 한다. 한 여름, 그 한 편의 스펙트럼 속 성인의 발자취를 찾아 떠났다. 색신여래, 진묵대사 일화한 제
원기 16년(1931) 9월, 소태산 대종사는 남부민동의 선주였던 박허주의 집에 머물렀다. 10여일 체류하는 동안 회원들의 입회도 증가했다. 장적조 선진이 원기 15년 부산에서 순교할 때로부터 이때까지 입회한 회원은 총 80여 명이 되었다. 당시의 분위기를 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불시창 16년 팔월경에 청(請)함을 받고 종사주 모시고 동래 부산을 가게 되었다. 일단식일상과(一簞食一箱果)로 11시 급행 열차 내려가니 장하고 기쁘도다.(중략) 지성기도에 금석가투(金石可透)라, 어찌 대회상 아니될까. 전후 좌우로 종사주
초량교당에서 초량초등학교를 향해 걸었다. 간간히 부산 앞바다가 한 눈에 보인다. 마치 산 중턱을 걷는 기분이랄까. 초량근대역사갤러리를 관람하며 초등학교 정문에 도착했다. 청소년들이 축구를 하는 이 생생함, 그때도 이렇듯 생생했겠지. 초등학교 건물을 바라보며 대종사님의 강연 장소를 찾아본다. ‘어디가 강당이었을까?’ 강연하시던 7월 24일은 한 여름 무더위였을 것이다. 100여 명의 청중은 그나마 한 번씩 찾아오는 바람에 땀을 식히며 대종사님 법설에 두 눈과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했으리라. 그 청중 속에 필자는 어디쯤 앉아 있었을까?
답사. 이성심 편집인 초량교당은 현재 천일기도를 진행 중이다. 소태산 대종사와 정산 종사의 발자취가 교당 깊숙이 자리해 있으며, 교단 초기 교도들의 뿌리 깊었던 교화 재건을 위해서다. 특히 해방 전 정산 종사는 초량교당 법당에 ‘사은상생지 삼보정위소(四恩相生地 三寶定位所)’라 쓰시고 시국의 안정을 염원,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부산역을 이용하시던 소태산 대종사의 발자취가 깊숙한 초량교당의 역사를 살펴봤다. 현재 부산역과 초량교당은 1Km 거리이며, 소태산 대종사 이용 당시엔 초량교당 이전이므로 700여 미터라 추정된다. ○ 기차를
원기 15년(1930) 이타원 장적조 선진에 의해 시작된 부산지역 교화에 소태산 대종사는 원기 16년 방문, 이후 10여 차례를 더 내왕했다.○ 하단교당 초대교무 김기천 선진삼산 김기천 선진이 원기 17년 5월 하단교당 교무로 부임했다. 당시 하단교당은 초창이라 가옥과 장소가 협소할 뿐 아니라 이해 없는 사람들의 비평도 많았으며 여러 가지 역경이 속출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기천 선진은 수양력으로 모든 경계를 초월하여 자기 할 일에만 충실했다. 이러한 김기천 선진을 대종사는 ‘시비를 초월하고 희로애락에 끌리지 않는 부처’라고 극찬했다
답사. 이성심 편집인 ○ 불법연구회 장적조 선진과 부산항구도시 부산은 불심(佛心)이 높다. 범어사나 통도사 등의 규모를 볼 때 그 불심의 정도를 헤아려볼 수 있다. 경상도 지역에 소태산 대종사의 방문, 설법은 새 부처님의 출현으로 받아들였을 것으로 보인다. 처음 대종사의 부산지역 방문 기연은 장적조(1878~1960) 선진으로 부터 비롯된다. 그는 부산으로 내려가 수양아들 이덕환의 집에 살면서 교화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이 때 부산 수정동에 거주하는 황대일화, 김선주화, 김정일화가 입회를 했다. 원기 15년 9월 19일자
새벽, 동트기 전 토함산 석굴암으로 향했다. 삼라만상이 어둠에 가려 분별이전의 시간만 지속될 것 같은 양 고요하다. 석굴암 주차장에 도착하니, 어느새 해는 멀리 토함산 능선 위로 말간 새 얼굴을 보여줬다. 감동이었다. 추위를 잊고 연신 카메라에 그 말갛게 반짝이는 해를 담았다. 석굴암으로 향하기 전 매표소에 들렀다. 그런데 아직 개방시간이 아니라 입장이 안 된단다. 입장을 기다리며 정문에 서서 기다릴 때, 금빛 찬란하게 빛나는 현판을 마주했다. ‘토함산석굴암(吐含山石窟庵)’ 여섯 글자가 떠오른 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 모습은 마치
답사. 이성심 편집인‘대종사 (상략) 그날 조반 후, 이웃에 사는 몇 몇 마을 사람이 동학의 을 가지고 서로 언론(言論)하는 중, 특히 ‘오유영부 기명선약 기형태극 우형궁궁(吾有靈符其名仙藥其形太極又形弓弓)’이란 귀절로 논란함을 들으시매, 문득 그 뜻이 해석되는지라, 대종사 내심에 대단히 신기하게 여기시었다.(하략)’ ( 제1편 제2장 5.대종사의 대각 중)에는 소태산 대종사의 대각 전·후의 내용들이 서술되어 당시의 상황을 헤아려 볼 수가 있다. 그 중 유·불·선 삼교의 경전을 두루
답사. 이성심 편집인원기 107년 12월 마지막 주, 한 해를 마감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분주했다. 차가운 겨울 공기, 구름한 점 없는 청명한 날에 서문성 교무가 정리한 자료를 챙겨 경주로 향했다. 경상북도 경주는 소태산 대종사가 원기 16년(1931) 음력 8월 조송광 선진과 2박3일 여행한 기연(旣緣)의 도시다. 조송광 선진의 연대기인 에는 소태산 대종사의 경주지역 방문 내용이 담겼다.현 대릉원 일원과 오릉, 토함산 불국사와 석굴암, 구미산 천도교 성지 등. 는 소태산 대종사의
소태산 발자취 따라 - 고창 심원면 연화삼매지영성회복의 터로 거듭나는 중답사. 이성심 편집인 원기 107년 명절대재를 마친 초겨울 12월 6일. 소태산 대종사가 대각하기 전 엄동설한에 석 달 간 마지막 정진을 했던 고창군 심원면에 위치한 ‘연화삼매지’를 찾았다. 12월이지만 햇살이 유난히 맑고 따뜻했다. 대설을 하루 앞둔 청명한 날, 22년간 연화삼매지를 수호 중인 심원교당 이도진 교무와 라남근 심원면장이 취재에 동행해 연화삼매지에 관한 이야기를 풍부하게 나눴다.○ 일원상을 모시다심원교당에서 연화제 옆 주차장 까지는 1.4km. 주
소태산 발자취 따라 - 부안 소태산 대종사 종곡유숙터, 곰소항영겁대사 해결할 인연들의 만남답사. 이성심 편집인 11월 5일. ‘화해제우지비’ 인근 나무들은 월동준비 차 전지작업이 한창이다. 늦가을 햇살은 오후 5시 30분이면 넘어가기에 화해교당 이봉원 교무의 안내로 서둘러 화해제우지(花海際遇地) 일대를 순례했다. ‘화해’라는 동네 이름은 지형이 새우가 구슬을 희롱하는 모양이 꽃 같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정산 종사가 대원사에서 화해 마동의 김해운의 집에 와서 머물며 7개월간 독공했다. 원기 3년(1918) 4월 소태산 대종사와 처
소태산 발자취 따라 - 부안 소태산 대종사 종곡유숙터, 곰소항종곡유숙터는 제법성지의 관문이자 신성·시봉의 길, 보은의 순례길이다.답사. 이성심 편집인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려 줄포IC로 진출, 줄포읍을 거쳐 종곡마을까지 10여 분. 소태산 대종사 종곡유숙터 앞으로 펼쳐진 황금 들녘이 넓은 마당이 되는 양 시원스레 잡념을 씻어준다. 유숙터란 이동 중 여장을 풀고 숙박을 했던 집터를 말한다. 가을 햇살만큼 따뜻함으로 종곡유숙터를 수호하는 이도전 교무. 이 터는 이 교무의 할아버지인 이춘풍 선진이 살았던 집이다. 혈연이자 법연인 조부의 유
소태산 발자취 따라 - 전주 한벽당, 다가공원심통 제자가 되면 나의 하는 일을 알게 될 것답사. 이성심 편집인 소태산 대종사와 전주! 어떤 인연이 있었기에 전주에 가신 것일까? 소태산 대종사는 원기 8년(1923) 11월(음)에 익산역 뒤, 오산면 송학리에 사는 박원석의 집을 거쳐 전주로 향했다. 변산 봉래정사에 주재 당시 이미 송적벽, 문정규 등 전주 인연 다수가 내왕을 했기에. 소태산 대종사는 전주에서 박호장과 이청춘 등이 청수동(현 교동)에 주선한 10여 칸의 집을 임시출장소로 정했다. 이 때 회상 공개에 관한 취지규약 (趣旨
소태산 발자취 따라 - 광화문 광장, 봉도청소년수련원“생명을 귀하게 알지 않으면 큰 죄를 짓게 된다.”답사. 이성심 편집인○ 광화문광장 역사 물길 8월 6일. 새롭게 조성해 개장한 광화문광장 여러 시설 중에는 1392년 조선 건국부터 630년 역사의 물길이 흐른다. 역사 물길은 정부서울청사 앞 육조마당에서 시작하여 광화문광장 전체를 흘러 한글분수까지 이어진다. 물 길을 따라 돌판에 새겨진 우리나라 주요 역사를 만나볼 수 있다. ‘1916 박중빈 원불교 창시’라 새겨진 돌판도 만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영역에 소재해 있다. 서울의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