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정탁   

 

공자의 수신과 처신법 

공자가 말했다.

“독실하게 믿고서 배우길 좋아하고, 올바른 도리를 죽을 때까지 목숨 걸고 지킨다. 그렇지만 위험한 나라에는 들어가지 않고, 혼란스러운 나라에도 살지 않는다. 또 천하에 도가 있으면 출사하고, 도가 없으면 숨는다. 그리고 나라에 도가 있는데도 내가 가난하고 천하다면 이는 부끄러운 일이며, 나라에 도가 없는데도 내가 다른 사람의 부귀를 함께 누린다면 이도 부끄러운 일이다.” 

子曰:「篤信好學, 守死善道. 危邦不入, 亂邦不居,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 邦有道, 貧且賤焉, 恥也, 邦無道, 富且貴焉, 恥也.」 (「태백」13)

 

이 글은 공자의 수신과 처신이 혼재돼 있는 내용이다. 먼저 ‘독실하게 믿고서 배우길 좋아하고, 올바른 도리를 죽을 때까지 목숨 걸고 지킨다’라는 건 공자의 수신과 관련돼 있다. 공자의 평소 언행과 관련지어 보면 이 내용은 수신의 자연스러운 한 방법이다. 그래서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반면 공자의 처신과 관련한 내용인 ‘위험한 나라에는 들어가지 않고, 혼란스러운 나라에도 살지 않는다’는 것과 ‘천하에 도가 있으면 출사하고, 도가 없으면 숨는다’라는 건 공자의 평소 언행과 비추어 볼 때 연결이 잘되지 않아서 뭔가 어색하다.

더구나 공자가 ‘독실하게 믿고서 배우길 좋아하고, 올바른 도리를 죽을 때까지 목숨 걸고 지킨다’라고 스스로 생각한다면 위험한 나라에 들어가고, 혼란스러운 나라에 살면서 이를 개선하는 데 더욱 정진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도 이와 반대로 말하니까 잘 이해되지 않는다. 또 천하에 도가 있으면 세상이 공자 능력을 굳이 필요로 하지 않으므로 공자는 숨어 살아야 하고, 천하에 도가 없으면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 공자는 세상에 나와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도 이와 반대로 말하니까 이 또한 잘 이해되지 않는다. 게다가 공자는 어지러운 세상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제자들과 긴 여정을 떠난 적이 있는데 이 여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무척 궁금하다. 

또 공자는 나라에 도가 있는데도 자신이 가난하거나 천하면 이를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한다. 나라에 도가 있으면 공자와 같은 성인은 이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기에 가난하거나 천해질 수가 없다. 그런데도 가난하거나 천해지면 그건 공자의 도가 부족해 천하의 도와 부합하지 않는 일이므로 당연히 부끄러워해야 한다. 또 나라에 도가 없는데도 군주나 대부의 부귀를 공자가 함께 누리면 이도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한다. 나라에 도가 없어서 백성은 힘든 삶을 살아가는데 공자만 권력과 결탁해 배부른 삶을 살아가는 것이므로 당연히 부끄러워해야 한다.

      

 증자의 수신과 처신법  

증자(曾子)가 병을 앓자 제자들을 불러서 말했다.

“이불을 젖혀서 내 발을 살펴봐라! 그리고 내 손도 살펴봐라! 『시경』에 이르길 ‘두려워 조심하고, 깊은 못에 임하듯 하고, 얇은 얼음을 밟듯이 하라’. 

그래서 그동안 내 몸을 조심해 왔는데 이제야 내 몸을 다치게 하는 죄를 면했음을 알았다! 제자들아!”

曾子有疾, 召門弟子曰:「予足! 予手! 詩云:『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

而今而後, 吾知免夫! 小子!」 (「태백」3)

 

공자의 제자인 증자(曾子)의 수신하는 방법 중에서 하나는 몸을 온전히 보존하는 일이다. 부모가 준 몸을 다치게 하거나 상하게 하는 건 부모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보아서다. 그래서 옛날 선비들이 수염을 깎지 않고, 머리도 자르지 않은 채 상투를 튼 것도 이 때문으로 본다. 효(孝)를 충실히 행한 제자로 유명했던 증자는 이를 철저히 준수했다. 그런 증자가 큰 병을 앓아서 죽음에 이르자 자신의 몸을 어떻게 잘 보존해 왔는지를 제자들에게 증명해 보인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불을 젖혀서 자신의 손과 발을 살펴보라고 말했다. 아마도 제자들은 상처 하나 없이 잘 보존된 증자의 손과 발을 보았을 거다. 

나아가 증자는 제자들에게 『시경』에 있는 글귀를 인용하면서 제자들에게도 몸을 잘 보존하도록 주문한다. 『시경』에 이르길 ‘두려워 조심하고, 깊은 못에 임하듯 하고, 얇은 얼음을 밟듯이 하라’고 했는데 이런 식으로 몸을 잘 보존하라는 말이다. 

한편 『시경』에선 두려워 조심하라는 것을 위해서 전전긍긍(戰戰兢

兢)이란 표현을 사용했는데 과연 어떻게 하라는 말일까? 함부로 나대서 몸을 다치게 하는 죄를 짓지 말라는 뜻이 아닐까. 그래서 증자는 자신의 내면을 늘 잘 닦아 타고난 몸 그대로 세상을 마칠 수 있게 하는 게 부모에 대한 도리를 지키는 일이라는 걸 제자들에게 강조하고 싶었다.

 

증자가 말했다. 

“선비는 뜻이 넓고 굳세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건 책임이 무거운데 갈 길이 멀어서다. 어째서 선비의 책임이 무겁고 멀까? 인(仁)의 실현을 선비의 임무로 삼았으니까 또한 무겁지 않겠는가? 또 죽어서야 인의 실현이란 임무를 마치게 되므로 또한 멀지 않겠는가?”

曾子曰:「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 (「태백」7) 

 

이 글에 등장하는 홍의(弘毅), 즉 뜻이 넓고 의지가 굳세다는 건 정조가 세손 때 영조에게 말해 유명해진 단어다. 이 말을 들은 영조가 세손이 왕위를 잇는 것에 대해서 비로소 안심했으리라 본다. 여기서 뜻이 넓다는 건 포부가 원대하다는 것을 말하고, 굳세다는 건 의지의 굳셈을 말한다. 그런데 뜻이 넓고 굳세다는 건 증자가 선비의 도리로 말한 것이지 왕의 도리로 말한 게 아니다. 왜냐면 왕은 선비보다 넓은 시야를 가질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왕이 선비보다 넓은 시야를 가져야만 백성이 고루 잘 살 수 있다. 아마도 정조가 세손 시절이었으므로 세상을 보는 눈이 아직 트이지 않아 이런 대답을 했을 거라고 보인다.

증자는 선비의 뜻이 넓고 굳세야 하는 건 선비의 책임이 무거운데 갈 길이 멀어서인 것을 그 이유로 들었다. 어째서 선비의 책임이 무거울까? 증자에 따르면 인(仁)의 실현을 선비의 임무로 삼아서다. 이는 선비에게도 인의 실현이 그만큼 쉽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또 어째서 선비의 갈 길이 멀까? 죽어서야 인의 실현이 이루어져서다. 인의 실현은 선비에게도 이처럼 평생을 두고 실천해야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정조도 왕이 된 뒤로는 인의 실현이 무겁고 멀다고 느꼈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정조는 정학(성리학)이 사학(천주학)을 물리칠 거라는 인내심을 갖고 천주교를 대하지 않았는가. Ι명예교수·성균관대학교 소통학. smilejt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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