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사후 신화는 다양 ... 종교의 존재 이유와 연결

글·사진. 박정원  전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연구원  

 

죽음은 종교의 존재 이유 중에 가장 중요한 신화적 요소이다. 인간이 가장 궁금해하는 죽음 이후의 내생을 종교에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가 부활했다는 내용은 완벽한 신화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동양 종교인 불교, 유교, 도교에서도, 그리고 원시종교에서도 항상 죽음은 신화와 연결된다. 

일본의 민속학자 오바야시 다라(大林太良)는 죽음과 관련한 세계의 신화를 몇 가지로 정리한 게 눈길을 끈다. 인간이 신의 명령을 위반했기 때문에 죽음이 생겼다는 형과 신이 인간에게 불사(不死)를 주려 했으나 신의 뜻을 동물이 잘못 전달해 죽게 되었다는 형, 이신대립(二神對立)해서 죽음이 기원했다는 형, 탈피(脫皮)가 중지되어 죽음이 생겼다는 형 등 다양한 형태의 죽음 관련 신화를 소개하고 있다. 

중국의 이족(彛族) 창세서사시에서는 죽음이 없는 세상은 늙은 사람이 넘쳐나 그들을 보살피기 위해서는 인간의 온전한 활동이 불가능해진다고 했다. 그래서 인간이 신에게 죽음을 달라고 요청했다고 신화는 전한다. 이 같은 신화는 북미 인디언 신화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태초에 죽음이 없어서 세상은 온통 사람 투성이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고, 더 이상 사람이 생겨났다가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아 각 부족의 추장들이 회의를 해서 사람들을 교대로 잠시 죽게 했다가 마술사가 영혼을 소생시켜 되살아나도록 하자고 결정했다. 하지만 코이오테가 인간의 영원한 죽음을 주장하며 영혼이 소생하지 못 하도록 방해함으로써 결국 인간이 죽음을 맞이하게 됐다고 한다. 

신의 뜻을 동물들이 잘못 전달하여 죽음이 생기는 형태는 아프리카 지역에서도 여러 사례가 소개된다. 동북 아프리카 갈라족의 신화에서 잘 나타난다. 여기서는 신이 파랑새에게 인간이 영생할 것이라는 전갈을 맡겼으나 길에서 고기를 먹고 있는 뱀에게 고기를 얻어먹는 조건으로 신의 전갈을 대신 알려주어 뱀은 영생하고 인간은 죽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죽음 관련 신화는 제주도의 <차사본풀이>에서 잘 드러난다. 신이 인간의 수명을 정해 인간들에게 전달하는 형태로 나타나서 여타 신화에서 죽음이 없던 데서 새로 생겨나는 것과는 차이를 보인다. 우리 창세신화나 <삼승할망본풀이>처럼 세상이 처음 창조되고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에서 이미 이승과 저승, 즉 인간의 세계와 죽음의 세계가 나눠져 설정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종교에서는 죽음을 신화보다 한 단계 발전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특히 동양종교에서 두드러진다. 유교에서는 인간의 삶을 인격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으로 본다. 그래서 노인은 완성된 인격체로서 공경의 대상이 된다. 불교에서는 인생을 고해의 바다라고 했듯이 탄생과 죽음이 고통이라고 한다. 죽음이 고통이라고 깨달았을 때 그 고통은 찬란한 깨달음, 즉 진정한 자아를 만날 수 있다고 말한다. 도교에서는 인간의 생로병사는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으로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무위자연의 한 과정으로 죽음을 바라본다. 기독교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로 대표된다고 할 수 있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시지는 살아 있음을 감사하라는 의미와 함께 언제든 죽을 수 있으니 즐거움으로 삶을 채우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하지만 종교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종교가 철학이나 윤리, 도덕이나 규범과 분명히 구별되는 이유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죽음에 대한 해결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종교마다 방식이 다 다르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으니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선악과를 먹으면서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이미 아는 바이다. 여기서 예수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믿으면 인간은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한다. 

불교의 죽음 이후 세계는 매우 복잡하다. 분명한 사실은 49재와 천도재를 통해 죽음 이후의 세계가 확정된다. 물론 업(業)이라는 개인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 결과에 의해 좌우된다. 불교에 있어 주목해야 할 점은 삶과 죽음이 분리된 둘이 아니라는 점이다. 생사불이(生死不二)이다. 연속적인 것이며, 상호의존적인 것으로서, 서로가 서로를 전제한다. 태어남이 시작인 것도 아니고, 죽음이 끝도 아닌 것이다. 삶과 죽음은 윤회라는 하나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서로 다른 양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원불교는 불교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더욱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대종경> 천도품에 ‘(전략) (생사 이치의) 원리를 아는 사람은 이 육신이 한 번 나고 죽는 것은 옷 한 벌 갈아입는 것에 조금도 다름이 없을 것이니 변함에 따르는 육신은 이제 죽어진다 하여도 변함이 없는 소소(昭昭)한 영식(靈識)은 영원히 사라지지 아니하고, 또 다시 다른 육신을 받게 되므로… (중략) 이 이치를 아는 사람은 생사에 편안할 것이요, 모르는 사람은 초조 경동할 것이며, 또는 모든 고락에 있어서도 그 원리를 아는 사람은 정당한 고락으로 무궁한 낙을 준비할 것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러한 희망이 없고 준비가 없는지라 아득한 고해에서 벗어날 기약이 없나니… (후략)’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속된 표현으로 하자면 개 같이 살면 개로 태어나고, 정승 같이 살면 정승으로 태어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어떻게 살고, 어떻게 태어나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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