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원상을 향한 애틋한 청정심은

나와 내 주변을 정화하고 화평하게 한다.

 

글. 여도언  

 

삶이 마음에 절망을 안겨 생채기를 낼 때, 고난을 줘 몸서리를 치게 할 때 우리는 어떤 가피처(加被處)로 찾아가야 하는가. 거기에는 마땅히 평온 축복 지혜가 가득해야 한다. 삶에 진정한 가치를 부여하고 내일에 대한 희망을 찾게 하며 잘 살아갈 자신감을 안겨주는 곳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더 진보한 세상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십승지(十勝地)로 들어가야 한다. 흔히 최고의 피난처로 알려진 십승지는 사실 첩첩산중 두메산골을 일컫는 장소가 아니다. 난리를 피해 조용히 숨어 지낼 수 있는 이상향의 땅을 가리키는 공간이 아니다. 십승지는 마음 안에 있다. 천지(天地)의 에너지가 내면에 축적해 있는 영역을 말한다. 부처가 살고 있고 선기(善氣)가 모여있는 신성한 그 자리 일원상이 곧 십승지이다.

신령한 에너지를 품고 있는 일원상은 아름다움과 선함, 지혜로움과 은혜로움으로 현현(顯現)한다. 우리에게 선한 에너지를 무한 공급하는 것이 일원상이다. 이러하기에 일원상을 향한 애틋한 청정심은 나와 내 주변을 정화하고 화평하게 한다.

어제 일원상에 대한 믿음이 잘 보관되어 있었다고 해도 오늘 이 믿음에 상처가 생겨 신성한 믿음으로 이어지지 못하면 그 믿음은 스쳐 지나간 한낱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의심을 떨쳐내고 이성의 근저에 있는 감정의 언어로 기도하는 능력을 이미 갖추고 있음을 알아차릴 때 누구에게 빼앗길 수도 잃어버릴 수도 없는 독실한 믿음은 깨어난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환경이 달라지고 믿음의 근간이 흔들리며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당하는 힘겨운 상황에 놓여 있다. 편견에 갇힌 무지, 무의미한 증오, 격차의 견고화, 방종의 확산 등 사회 전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조건들이 즐비하다. 이런 가운데서도 우리는 은혜와 사랑, 합력과 질서 의식을 가지고 하루하루 잘 살아가려 애쓰고 있다.

인생에서 영적 능력을 쌓는 데 걸리는 시간은 짧지 않고 매우 길 수 있다. 디지털카메라로 찍어 보정하고 저장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도 우리 내면에서 영적 능력을 집적하고 또 완성하려면 수십 년을 아니 때로는 평생을 바쳐도 이루지 못할 수 있다.

일원상은 우리와 선지자들을 이어주는 다리와 같다. 단순한 시간적 연결을 해주는 매개체가 아니라 영적 세계로 인도하는 반야선(般若船)이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지혜를 가르치는 신비한 이정표이다. 자물쇠로 잠겨 있지 않아 누구나 쉽게 들어갈 수 있지만 마음을 열지 않으면 결단코 응대하지 않는 신묘한 개벽문이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정법을 지키며 진리를 체득하고자 하는 자세를 갖추기만 하면 일원상은 단박에 빗장을 푼다.

일원상을 잠깐 보는 시간에도 죄는 조금씩 사라지고 혜와 복은 쌓인다. 일원상은 한가지 죄만 소멸시키지 않는다. 많은 죄를 함께 씻어준다. 그 죄가 가볍든 무겁든지 간에 모든 죄를 녹여 치유한다. 우리가 슬픔으로 억장이 무너질 때 불운으로 진저리가 날 때 일원상은 홀연히 빛을 선물한다.    

 


 

여도언 님은 항도 부산에서 기자 생활을 했으며, 부산일보 논설위원을 역임했죠. 지금은 한국언론진흥재단 특임강사로 활동 중입니다. 해운대교당. y525483@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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